아무것도 갖지 않은 자의 부(富)
/ 법정 스님
지난 동안거 결젯날,
절에서 일을 보고 내 거처로 돌아올 때였다.
오전에 비가 내렸다가 오후에는 개었는데,
경기도를 벗어나 강원도 접경에 들어서자
예전 표현으로 맷방석만한 보름달이 떠올랐다.
보름달을 안고 돌아오는 길이 너무 충만하여
마치 달을 향해 우주비행을 하고 있는 듯 생각이 들었다.
늦은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그와 같은 환상적인 우주비행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의 피곤이 말끔히 가실 만큼 산뜻한 귀로였다.
늦은 시간에 돌아오니
적막강산에도 달빛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뜰은 달빛으로 인해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서둘러 난로에 장작을 지퍼 잠든 집을 깨웠다.
이 넓은 세상에서
내 몸 하나 기댈 곳을 찾아
이런 산중에까지 찾아드는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이 또한 내가 일찍부터 익힌 업이 아닐까 싶다.
다리 밑에서 거적을 뒤집어쓰고 사는 거지도
제멋에 산다고 하니까.
한 어머니는
가로, 세로 각각 1미터 80센티미터 되는 한 평의 공간에서
요즘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아들이 공부하러 떠나고 난 뒤
그가 거처하던 방을 이리저리 정리하고 보니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틈새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평소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나만의 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맨 먼저 기도실을 만들어 불화를 걸고
향로와 촛대를 올려놓고 화병에 꽃을 꽂아
아침마다 그 앞에서 기도를 한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남의 이목에 신경 쓸 것이 없이 기도하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의 변화를
염불이나 독경소리에 담아 삭여버린다.
두 번째는 화실 만들기.
컴퓨터 프린터가 있는 책상의 한 쪽을 이용해서
화판을 올려놓는다.
그 위에 스케치북과 화구를 놓아두니
열 평의 화실이 부럽지 않은 공간이 된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남겨준 한 평의 공간에서
이렇듯 조촐한 행복을 만들어가고 있다.
작고 비좁은 곳에서도 살 줄 아는 사람은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북인도의 오지인 라다크 지방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한 티베트 노인은
현대인들이 불행한 이유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한다.
‘…아마도 당신들은
당신들이 갖고 있는 좋은 옷과 가구와 재산이 너무 많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과 기운을 빼앗겨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차분히 자신을 되돌아 볼
시간이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불행한 것은
가진 재산이 당신들에게 주는 것보다도
빼앗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현대인들의 가슴을 찌르는 명언이다.
물건과 재산만으로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은 예전에 비해 많은 물건과 편의시설 속에서
영양분도 많이 섭취하면서
잘 먹고 잘 입고 번쩍거리며 산다.
그러나 만족할 줄도, 행복할 줄도 모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율도 높다.
티베트 노인의 말처럼
현대인들이 불행한 것은
모자라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 넘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어째서 그토록 넓고 크고 많은 것이 필요한가.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옛사람의 지혜를
오늘 우리는 다시 배워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의 인간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에 의해
내 인간가치가 매겨진다.
따라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열정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의 사람됨이다.
새 천년이 온다고
동서양을 가랄 것 없이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떠들썩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달력이 한 장밖에 남지 않은 12월이다.
저마다 오던 길이 되돌아 보이는 길목.
나 에겐 지난 한 해 동안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스스로 묻는 그런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12월을 가리켜
말수가 적어진 침묵의 달이라고도 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몇몇 곳에 다녀온 일이 떠오른다.
몽골의 황량한 사막지대와 동토의 땅,
시베리아를 지나 우랄산맥을 넘고 볼가 강을 건너는 길을
봄, 가을 두 차례 오고갔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태평양 건너 옛 인디언의 땅
미대륙의 동부를 다녀오기도 했다.
가는 데마다 우리말과 우리 음식과 우리 습관이 있어
지구가 한 동네임을 실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움츠린 채 살고 있다.
어째서 그런지 그 까닭이이 화두처럼 다가선다.
무릇 인간관계란
신의와 예절로써 이루어진다고 평소에 생각해 온 바이지만
우리는 신의와 예절이 모자란다.
그것도 수준 이하로 모자란다.
그래서 남들은 우리를 선뜻 신뢰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경제상태가다시 어려워진 것도
정부와 기업뿐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신의와 예절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데
그 까닭이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이 겨울,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첫걸음부터 내딛어야 할 상황이 이른 것 같다.
1959년 티베트에서
중국의 침략을 피해 80넘은 노스님이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에 왔었다.
그때 기자들이 놀라서 노스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토록 험준한 히말라야를
아무 장비도 없이 맨 몸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까?”
노스님의 대답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지요.”
자신의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단다.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이와 같다.
순간순간 한 걸음 한걸음 내딛으면서 산다.
문제는 어디를 향해 내딛느냐에 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곳을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가.
내 곁에서 꽃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