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여성은 점차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남자만이 학문을 하게 되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과거를 볼 수 없어 관직에 진출할 길은 전혀 없었다. 물론 관직에도 내명부라 하여 남편의 지위에 따라 그 부인도 관품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실권이 전혀 없는 오히려 여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도 외국처럼 결혼한 여자의 성을 없애는 일은 없었다. 조선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집안간의 결합이었으므로 각자의 가문에 대해서는 존중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여성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면 곤란하다. 조선전기에는 유교적 가치관의 남녀관이 정립되지 않아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남성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재산의 상속도 남녀의 차별 없이 균등하게 이루어졌으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형제간에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輪廻奉祀)가 보편적이었다. 또한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사위, 외손이 제사를 지낼 수 있어서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특히 남녀간을 맺어 주는 결혼은 여성의 입장이 더 유리하였다. 결혼식은 신부집에서 치러졌으며 자식을 낳아 한 가정을 이룰 때까지 친정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사회의 남녀 관계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의 지배이념이 확고하게 성립되면서 반전된다. 이후 조선사회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점점 열악해진다. 특히 결혼이 시집살이를 강요하는 형태로 변모하자 여성들의 지위 향상은 물론이고 사회진출은 완전히 차단되게 된다. 전통사회의 결혼은 임신, 출산, 양육, 가사노동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결혼에 따른 시댁에 대한 여러 가지의 의무사항은 여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사회활동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제약이 성립된 후의 조선시대 여성은 일반적으로 방갓을 쓰거나 장옷을 입고 얼굴만 조금 내민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이다. 얼굴을 가리지도 가릴 것도 없었다. 오히려 19세기가 되면 영남의 일부와 관북지방에서는 여자가 장터에 나가 상인과 상대하며 흥정을 벌였다. 특히 관북의 여성은 목축과 밭일을 남자 이상으로 하였다. 삶의 터전이 척박한 곳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중심으로 조선 여성들의 생생한 삶의 체취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촬영되어 대부분의 자료가 국외에 소장되어 있다는 시대적 특수성에 의해 빚어진 매우 귀한 자료입니다. 는 16세기 이후 서양인의 눈에 비친 한국여성을 삽화를 통해 살펴봄으로 우리 여성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항아리 이고 가는 촌부 1900년대
|
'♣ 추억방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옛날에 살던 모습 (0) | 2008.10.31 |
---|---|
[스크랩] 아련한 그시절-명절풍경들 (0) | 2008.10.31 |
[스크랩] 그시절 사진들 (0) | 2008.10.31 |
[스크랩] 그집앞 (0) | 2008.10.31 |
[스크랩] 아주 귀한 조선시대 사진입니다 (0) | 2008.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