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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청도 삭고개

그대는 모르리 2008. 10. 28. 20:59

삭고개.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한라산까지 이어지던 백두대간이

구미, 선산, 대구, 하양, 경산에 이르러 그 산세가 한풀 꺾이는가 하다가

다시 남천, 남산면에 이르러 선의산, 대왕산을 시작으로

평균해발 700M이상의 준령들이 경남 밀양의 종남산, 영취산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태산 봉우리들 중 분지형태의 청도읍을 우측으로 휘감아 도는 693M의 용각산과

932M의 화악산 사이의 100여리 산맥 중앙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내면에서 밀양을 거쳐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지천인

동창천을 끼고 형성된 또 다른 분지인 산동의 금천면과 매전면을

사이에 두고 785M의 구만산, 944M의 억산, 1240M의 가지산 등을

발아래 굽어보고 있는 오지중의 오지 마을이다. 가히 하늘아래 첫 동네라 할 만 하다.

동네의 통상 명칭은 삿고개, 삭고개, 삭꼬 등으로 불리우며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용산동 사현리 산 1340번지 일대가 된다.
북북서 쪽으로 청도읍이 대략 삼십여리, 동남쪽으로 큰골을 따라 사깔(용산)이 십여리
남쪽으론 용당골을 거쳐 명대, 용전 마을이 대략 시오리 밖에 위치하고 있다.

 

삭고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우지만 그러한 이름이 붙게 된 유래는
정확히 알지를 못하며 청도군에서 발행한 마을 이름의 유래에서도

동네이름 자체가 거론조차 되어 있지 않다.

 

다만 어림짐작으론 같은 동에 속한 사깔의 명칭이
모래지질에 기인했다는 설과 맥을 같이하여 짐작컨대 산동 방면에서

청도읍으로 넘어가는 모래지질의 큰 고개 마루에 위치하였다하여
모래고개마을(사고개, 沙峴理)이라는 명칭이 붙여지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삭고개서 내려다보이는 동쪽 풍경.

 

 

마을의 역사
매전면 사무소가 위치한 동창에서 관하를 지나 곰티재를 넘어 청도읍에 이르는
지방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용전, 가례, 명대, 온막, 호방, 길명, 고방, 장싯골,

사깔, 복지, 동화 등 산동 지방의 마을들에서 청도읍으로 가기 위해서는

삭고개 마을이 위치한 산을 넘어 다닐 수  밖에 없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마을의 가구수가 15호가 넘을 정도로 번성(?) 하였으며 타지 사람들의 왕래도

빈번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동네가 생겨난 정확한 연혁은 알 길 없으나 다만 필자의 고조부모님과

증조부모님의 산소가 그곳에 있으며 산신제를 지내던 마을 당신나무의

수령이라든지 산소의 도래솔(註. 산소 주변에 빙 둘러 심어진 큰 소나무)들의

수령을 참고로 짐작컨데 최소 150년은 되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마을 산신제는 돌아가신 필자의 선친께서 마지막 산신제관을 지냈으니까

1960년대 초반까지도 이어졌었다. 지금은 마을의 쇠락에 따라 당신나무도

다 죽어 쓰러지고 없으며 산신제단도 무너져 흔적만이 남아있다.

 

마을의 생활방식
삭고개 마을에서의 모든 생활은 현대적 문화, 문명의 혜택과는 동떨어진

전근대적인(좋은 말로 전통적인) 생활방식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다.

전기, 전화가 들어오지 않았으니 호롱불로만 밤을 밝혀야했고 시장, 학교, 관공서가

멀리 동떨어져 있으니 면사무소 출생신고 한번 하는 것도 새벽 별보고 출발해야

저녁 어스름 녘에 돌아올 수 있었고,

 

청도읍에 서는 4일장(4일, 9일이 청도 장날이다)을 보기 위해서도

역시 새벽 별과 저녁 달 따라 오갈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초등학교는 시오리 산아래 명대 마을에 가야 하는데 등교길은 내리막길이라

한시간 조금 넘는 시간이면 뛰어서 등교할 수 있으나 집에 돌아오는 길은

30~50CM의 좁고 험한 오르막 산길 두시간 정도 걸어야 했다.

 

4학년 정도 넘는 아이들은 그럭저럭 다닐 만 했으나

일곱 여덟살짜리 코흘리개 들에게는

가혹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중학교부터는 유학하듯 먼 동네에서 방을 구해 자취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지금 돌이켜보면 학생들 몸고생보다 부모님들 마음고생이

얼마였을까 가슴이 시리어 온다.

 

경운기도 올라올 수 없는 산속 마을이라서 순전히

소와 지게만을 가지고 농사를 지었다.

산아래 마을의 농사가 50년대 후반 무렵부터 리어카와 경운기라는

가히 혁명적인 농기구와 운반기구의 등장으로 수월해졌어도

삭고개에선 지게와 소에 의존했으며 탈곡기로 추수하고 건조기가

도입되었어도 도리깨라는 탈곡방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설명해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살 수 밖에 없겠는가를...... 

그 생활이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난 이후까지도 계속되었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여건으로 의해 의료대책 역시 전무한 실정이었다.
가장 가까운 병원이 산넘어 삼십여리 떨어진 청도읍에 있던

반재돈 의원이 전부였었던 형편상 어지간히 아파도 세월이 약이거니

하고 참고 넘길 수밖에 없었고 조약이라고 불리우던 민간요법에

의존하는게 대부분이었었다.

 

필자의 기억으로 초등학교 1~2학년 때 지금은 돌아가신 고실 아지매께서

몹시 아프셨는데 며칠을 앓으시다 결국 고실 아재께서 아지매를 지게에 지고

재넘어 병원에 가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필자의 동생도 갓난아기 때 소아마비가 걸렸었는데 어머니께서 밤을 낮 삼아

업고 세시간씩 걸어 청도읍과 관하 쪽으로 치료를 다니셔서 결국은 낮게 만드셨다.

 

또 먼담 아재(용섭이 형님 부친)께서도 어느 해인가 농사일 하시다

낫으로 발목에 아주 큰 상처를 입으셨는데 (뼈가 다 보였었다) 지금 같으면

최소 50~60바늘 꿰매고 2~3주는 입원해야 할 정도였으나 빨간 약 아끼정끼 바르시고는

소죽 솥에 물을 붓지 않고 불을 때어 달아오른 무쇠솥의 열기에 상처 부위를 훈증으로

소독하는 것으로 치료를 대신하던 일도 있었다.

 

또 송자 누나네가 부야로 이사 간 후 이사 들어온 최 태봉 씨의 아주머니께서

둘째를 출산하시다 잘못되어 사산을 했었다.
산모의 목숨마저 위협받던 상황에서도 병원에 가지를 못하고 필자의 모친께서

천신만고 끝에 태반 안에서 죽은 아기를 꺼내고 산모의 목숨을 겨우 구해냈을 정도였었다.

 

마을의 쇠락
조국 근대화라는 기치 아래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일어났던

농촌 근대화 운동인 새마을 운동과 도시산업사회로의 변환을 통해

보릿고개를 극복해내던 당시 산간 오지에서 나오는 소득으로는

기초생활비, 농약대금, 의료비 등 사회 비용과 2세들의 교육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은 1970년대 중반 어느해

모진 가뭄을 겪은 이후 한집 한집 도시로의 탈출을 꾀할 수 밖에 없었다.

 

1년에 한두집씩 가까이론 청도읍에서부터 먼 부산, 울산, 밀양,

경주 등 타향으로 타향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마지막으로 마을을 끝까지 지키던 두섭이 형님까지

부산으로 떠남에 따라 1990년대 초반부터는 한집도 살지 않는 폐촌이 되었다.

 

그러다가 2~3년 후 안상일 형님이 양잠의 꿈을 키우며 다시 들어와

잠실(註. 누에치는 집)을 짓고 다시 정착한 이후 현재까지 1가구가 마을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나 농사의 수익성 악화로 인해 누에치기와 10여두의 한우사육의

수익영농외 찬거리 자족을 위한 소규모 밭농사 밖엔 지을 수가 없어서

마을 전성기 시절의 많던 논밭들이 대부분 메워지고 산으로 변해가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논밭이 메워지고 지붕도 녹쓸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현재의 삭고개.

 

글쓴이 - 이승혈
古之人有言 曰狐死正丘首仁也라...

고향으로 머리두고 죽는다는 여우의 마음으로...

 

출처 : 청도 삭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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