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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 고유의 풍물과 명물

그대는 모르리 2008. 11. 28. 10:13

사라져 간 풍물

짚신과 나막신 - 타박타박, 한양길 천리길도 세월재고 길을 재고

짚신오늘날 신발의 재료는 고무류와 가죽제품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우리의 선조들은 생활주변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짚과 나무를 이용해 우리의 신체 일부인 발을 보호하는 신발을 만들었다. 짚신은 대체로 날씨가 좋은 날에 신었고 나막신은 비가 오는 날 주로 신어 오늘날 장화(長靴)에 해당됐다.

짚신을 만드는 과정을 우리의 선조들은 짚신을 삼는다고 했으며 재료로는 짚, 삼, 닥(楮) 등이 사용되었다. 짚신의 종류는 삼이나 닥, 그리고 왕골 등의 재료 첨가에 따라 고은 짚신, 엄짚신, 부들짚신, 왕골짚신 등으로 분류됐다. 짚신을 삼을 때는 1발바닥 크기만큼 짚을 엮어 코는 다소 짧고 다소 엉성하게 짰다.

초리(草履), 초혜(草鞋)라고도 했던 짚신은 밑부분과 옆부분 등에 털모양의 짚이 비죽비죽 나온다고 해서 우리의 지역에서는 흔히들 ‘털미기’라고들 했다. 외출용과 작업용으로 구분해 외출용은 신발 앞 부분의 새끼코를 여러 개 넣어 촘촘하게 했으며 작업용 신발은 반대로 코를 드물게 했다.

특히 부녀자와 부유층 사람들의 신발로는 짚과 함께 삼(대마大麻)을 섞어 질기고 모양새 있게 만들었으며 이를 미투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운데 두 개의 중심코를 만들고 양쪽 10가닥, 도합 20개의 코를 중심으로 만들던 짚신은 대부분 작업용 신발이였으며 양쪽 모두 30개의 코를 넣어 만든 신발은 외출용이였다.

40여년전만해도 당시 상가(喪家)의 상제(喪制)는 생삼을 짚과 섞어 삼았던 삼신을 신었는데 이때 신발의 코는 양쪽6코, 도합 12개로 다소 엉성했다. 그러나 지금의 상제는 모두 12코의 짚으로 만든 신발을 신는다. 짚신이 거의 완성될 때는 발을 이등분 한 것과 같은 나무로 만든 두 개의 골을 짚신의 안쪽에 넣어 골의 중간에 보족으로 간격을 맞추고 방망이 등으로 두들겨 신발의 틀을 갖추게 했으며 또한 많이 두들겨 사람이 신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짚신짜기 틀

짚신 만드는 틀

언제나 바빴던 시절, 낮 일을 마친 아버지는 호롱불을 밝히시고 아이 것, 부인 몫, 자신의 짚신까지 컬레 컬레 삼아 집 뒷켠, 축에나 광속에도 보관했으며 이 짚신은 오늘의 구두와 비슷한 형태였으나 일부는 슬리퍼형태의 짚신도 있었다. 짚신은 노력만 하면 언제나 생산이 가능해 떨어질까 닳을까 염려조차 없었지만 고무신이 대중화가 시작될 때 “뛰지마라 신발 닳는다”는 어른들의 꾸지람도 뒤따랐다. 이는 품삯으로 사준 자녀들의 신발이 쉬 닳을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나막신도 두 가지의 종류가 있었는데 신분과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사용했다. 초기에는 일본의 게다(일본인들이 신는 나무신발)와 비슷한 형태로 나무바닥에 끈을 매어 신고 다니기도 했으나 조선시대는 오리나무 손무 등의 통나무를 발 모양으로 만들어 바닥을 파내고 신발 밑 부분에 굽을 만들어 이 굽에는 마모(磨耗)방지를 위해 쇠발을 달았다.

특히 남자용 나막신은 거칠었고 여자용은 거칠지 않게, 그리고 무늬를 넣어 맵시있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짚신과 나막신은 1910년대 고무신이 등장하며 차츰 쇠퇴, 1940년대를 기점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서서히 밀려나 50년대에 접어들어 실질적인 사용은 크게 줄었고 다만 70년대까지 우리의 시골지역 일부농가만이 비싼 고무신을 아끼기 위해 짚신을 만들어 작업용 신발로 대용하는데 불과 했다. 하지만 현재도 어설픈 듯 형태가 바뀌어 만들어진 일부 짚신은 상가의 상제들이 우리의 풍습에 따라 변함없이 사용하고 있다.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 고무제품과 피혁제품의 구두들이 새 물결을 이루는 오늘날, 우리선조는 물론 그들의 지혜가 담긴 짚신과 나막신마저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주변에서 사라져 갔지만 그들이 애써 남긴 발자취는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찬란한 한민족 생활문화의 밑거름이 되고 있음직하다.

 

 

사라져 간 풍물

소달구지 -   40대 이상의 사람이면 누구나 기억해 낼 추억의 소달구지 덜커덩 덜커덩 추억의 그 구루마.

소달구지

달구지를 타는 것만큼 신이 나고 재미나는 일이 있었을까? 1960년대, 당시 아이들은 달구지를 타보면 이것이 바로 서울사람들이 즐겨 탄다는 하이야(당시 사람들이 부르던 택시의 명칭)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짐을 실은 달구지는 터덜터덜 시골 길을 재촉하고 아이들은 주인의 눈치만 살피다가 한 순간 대롱대롱 달구지에 매달려만 봐도 그 날은 억세게도 재수 좋은 날, “나 오늘 구루마(짐수레의 일본어로 통용되던 말) 타봤다” 친구들에게 자랑이 대단했다.

때로는 잔뜩 짐 실은 달구지가 오르막길에 힘들어 할 때 아이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어영차 어영차 밀어 올리면 맘씨 좋던 달구지 아저씨는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돌아오는 길, 빈 달구지에 아이들을 태워 온통 아이들과 책 보따리 뒤범벅이었다.  신이 난 동심은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누가 먼저 선창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아는 노래는 모두 동원,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나는 커서 구루마 몰끼다” 아이들은 신나는 구루마를 마음껏 탈수 있다는 생각에 소박한 동심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요즘처럼 동력에 의해 움직이는 교통기구가 없을 때 달구지는 우리의 생활을 실어 나르는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박했던 꿈도, 그처럼 편리했던 당시의 교통수단도 추억의 사진첩에 묻힌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고 있다. 달구지는 소가 끌면 우차(牛車), 말이 끌면 마차(馬車)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마을마다 한두 대에 불과했던 달구지는 시골에서 장을 보러 갈 때 마을사람 공동으로 곡식가마니, 무, 배추, 나뭇단, 해산물 등 장에 내다 팔 물건들을 실었고 달구지의 주인은 매사를 서두르지 않던 선조들의 느긋한 마음으로 털거덩 털거덩 먼지길 신작로를 오가며 때로는 길을 묻는 나그네의 벗이며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기도 해 나그네는 달구지만 따라 가면 그가 찾던 동네나 사람을 만날 수가 있었다.
 

소달구지

볏단을 운반하고 있는 소달구지

우리나라 평야(平野)지방 등 대체로 길이 좋은 곳은 네 바퀴 달구지를 이용했고 반대로 길이 험했던 지역은 두바퀴 달린 달구지가 이용됐으며 특히 70년대 이전까지 길이 험했던 지역은 두 바퀴 달구지가 대부분이었다. 두 바퀴 달구지는 대부분 소가 끌었고 소의 등에는 길마(짐을 싣기 위해 소의 등에 얹는 안장)대신 쳇대를 길게 해 소의 목에 걸었고 쳇대 양쪽에서 목 앞으로 끈을 둘러 감았다.  두 바퀴 달구지의 바퀴는 매우 커서 보통 사람들의 가슴 높이만큼 되기도 했다. 이것은 달구지의 바닥이 울퉁불퉁한 바닥에 닿지 않도록 상틀을 높인 때문이었다.

네 바퀴 달구지는 두 바퀴보다 당시는 고속용으로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작았으며 거들이가 장치되어 좌우로 움직여 방향을 잡도록 했다. 달구지의 바퀴는 대부분 목재였으며 바퀴의 바같부분은 다소 얇은 탯쇠를 둘러 보강했다. 지난 1970년대 초반에는 나무바퀴 대신 자동차 타이어를 달구지의 바퀴로 대용하기도 했지만 구하기가 힘든데다 당시 가격 또한 비싸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우리 선조들이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던 달구지, 그 달구지는 오늘날 문명의 발달과 함께 경운기, 차량 등으로 대체되며 70년대말을 기점으로 우리의 곁에서 사라지기 시작, 이제는 우리의 주변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달구지의 바퀴만이 취미가들에 의해 수집돼 일부 가정, 또는 가게 등의 장식품으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현재 40대이상의 지역 사람이면 간간이 주인의 눈길을 피해 달구지에 매달리던 어린 시절의 추억, 맘씨 좋던 구루마 아저씨가 책 보따리와 함께 태워주던 신나던 그때 그 소달구지의 추억을 회상(回想)하리라 싶다.

 

사라져 간 명물

 갓 -   갓은 남자들의 나들이 길에 쓰고 다니던 모자였으며 흑립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지금은 역사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사라져간 품물 중 하나이다.

갓은 남자들의 전용물로 나들이 길, 쓰고다니던 모자 였으며 일반적으로는 흑립(黑笠)이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백관의 편복(便服)에 착용하기도 했던 갓은 평량자(平凉子, 패랭이-대로 엮어만든 갓의 일종), 초립(草笠, 풀로만든 갓) 등의 단계를 거쳐 마지막에 갓으로 정립됐으며 양반신분의 전용물(全用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갓은 문명의 이기(利己)속에 빛을 바래 우리의 생활속에서 물러나 박물관이나 민속촌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주변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갓을 만드는데는 골 까움골 골걸이 바농대 등으로 구성된 틀을 만들어야 했으며 이 틀을 이용해 입자장, 양태장, 총모장으로 구성된 기능공들이 말꼬리부분의 긴털이나 돼지 털, 또는 대나무를 실낱처럼 잘게 쪼갠 것으로 한낱 두낱 인고의 세월을 엮어가며 하나의 갓을 탄생 시켰다. 갓을 만드는 과정은 말총과 소총을 이용, 제주도 부인들이 만들던 탕건(宕巾, 갓 안에 쓰던 모자종류)을 골걸이에 맞춘후 솥에 넣어 삶고 아교풀을 붙인 다음 말려서 그위에 옷칠을 해 모자형태를 만들었으며 양태장과 총모장이 별도로 있었고 또한 조립을 담당하는 입자장도 있어 최종적으로 양태와 총모자를 결합, 완성했다.

특히 갓의 양태를 만들 때는 단 하나의 칼로 나무를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게 쪼개 설대와 살대, 옆대를 만들어 440개의 대들을 서로 엮어 완성해야 하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때문에 옛날 이곳 지방에서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양태는 엮어도 이것은 못할 노릇”이라는 속담이 나오기도 했다. 하나의 갓을 만드는데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됐으며 특히 변변한 장비조차 없던 시절, 갓을 만들던 손끝은 피의 대가를 요구받기도 했고 때로는 밤잠을 설치는 연속적인 시간 등 수많은 노력이 요구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갓을 하던 기능공들은 그들의 정신집중과 함께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위해 자신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갓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한코 떠라/ 두코 떠라/ 세코 떠라/ 속히 떠라/ 통양하나 돌아 갈제/ 쌍금 쌍금 쌍가락지/ 호작신을 닦아내어/ 먼데보니 달이 뜨니/ 후에 보니 처자로다/ 처녀애기 자는 방에/ 숨소리가 둘이로세/ 천도복숭 울오랍시/ 거짓말슴 말아주소/ 꾀꼬리라 그림방에/ 참새같이 내누었네/ 동남풍이 들이 불어 풍지 떠는 소리로다/ 거짓말씀 말아주소.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의 기능보유자 통영 서호동 출신, 현재 서울거주 정춘모씨 제공).
 

이 노래는 특히 갓의 양태를 틀 때 불리워졌으나 지금은 갓의 사양화와 함께 종사자들도 사라져 갓일의 기능보유자인 정춘모씨외에 기억조차하는 사람이 없다. 특히 통영갓은 조선조 14대 선조36년(1603년), 제6대 이경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통영 세벙관을 창건해 13공방을 설치하고 공방(工房)안에 입자장을 만들어 기능공을 관급으로 양성하고 갓을 생산, 군, 관, 민에 보급하며 유명세를 타기시작 했다.

대원군은 통영까지 친히 사람을 보내 갓을 맞추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고종황제의 붕어(崩御)시, 국상에는 모든 국민들이 흰 갓을 통영에서 맞추어 썼는데 이때 통영갓은 불티가 나 하루에도 300개이상 팔린 것으로 기록돼 통영이 갓의 본향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갓의 본향으로는 거제도를 빼놓을 수는 없다. 지난1914년 거제군이 통영군으로 통합돼 1953년1월1일이전까지 통영군으로 통칭된데다 통영갓의 양태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모만환(牟晩煥)씨(70년 작고)가 바로 둔덕면 학산리에 거주했으며 모씨 외도 거제에는 다수의 기능공들이 한때 갓일에 종사한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30여년전만해도 통영지역에는 입자장에 전덕기(全德基), 김봉주(金鳳珠), 양태장에 모만환(牟晩煥), 총모장에 고재구(高在九)씨 등이 기,예능보유자로 각각 지정돼있었으나 현재 모두 타계했고 입자장 김봉주씨에게 갓일을 배운 통영 서호동출신 정춘모씨(61)가 지난91년 5월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돼 갓의 본향 체면을 근근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제주에는 거제 출신 김 인씨(여·71)가 85년2월1일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이외에도 3명의 여자들이 갓을 만드는 일에 종사, 우리의 전통 갓은 간신히 명맥만을 이어가고 있다.

 

사라져 간 명물

거제 개(犬) -   수렵성이 뛰어나고 충직했던 거제의 개는 진돗개의 명성에 묻혀 이제는 전설이 되어 버렸다는데...

수렵성 뛰어나고 주인에 충직했던 개 거제개는 실존(實存)했는가?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거제개는 분명히 있었다. 수렵소설을 각 신문에 연재해 인기를 끌었던 작가 김왕석씨도 그의 글, 맹수와 명포수(꾼)에서 거제개의 실체를 증명하고 있다. 이책 제3권 305페이지 아홉째줄에는 영리하고 투지력이 강한 거제개의 활약상을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북 선산의 한 작은 마을에 한 사냥꾼이 거제산 중견 두 마리와 잡종견 한 마리로 노루사냥을 하러 갔다. 이 사냥개 세 마리가 산 중턱에서 노루를 발견하고 그 노루를 내몰아 아래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노루가 아래쪽으로 쫓겨 내려왔을 때 뒤를 쫓던 개는 두 마리뿐이었다. 그 사냥꾼은 으레히 한 마리는 도중에 낙오한 줄 알았는데 이 얼마나 영리한가! 노루와 두 마리의 개가 일단 아래쪽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건너 산 위로 올라갈 동안에 낙오한 줄 알았던 그 한 마리 개가 산허리를 가로 질러서 건너산 중턱으로 달려가 있지 않는가. 마치 사냥꾼이 노루목을 잡아 지켜선 것처럼 노루가 올라올 목으로 직행한 것이다. 마침내 노루가 목까지 이르자 그 개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노루와 개는 한 덩어리가 되어 딩굴었다.”

이밖에도 현재 50대이상의 거제인이라면 어린 시절 거제개가 노루를 잡는 모습들을 똑똑히 목격했을 것이며 또한 거제개가 엮어낸 각종 이야기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어진다. 거제개는 북방개 일종인 몽고개와 우리나라 토종개인 도서지방 개들의 혼합종으로 추정되며 체구는 대형개와 중형개의 중간 사이로 우리나라 육지의 개들보다는 체구가 다소 컸고 색상은 백색, 황색, 흑색, 재색 등 혼색종이 다양하게 있었으나 대체로 백색과 황색계통이 흔했다는 것이 거제개를 길러본 사람들의 주장이다.

진돗개와 흡사한면도 있었지만 체구가 다소 컷던 거제개는 특히 송곳니가 길고 끝은 안으로 약간 휘어져 있었으며 사냥에 나서서는 표독스런 맹수로 돌변, 목표물을 끝까지 추적해 포획하는 지구력을 겸비했었다. 오랫동안 거제개를 길렀던 지역민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거제개는 사냥감의 진로까지 예측할 줄 아는, 그야말로 수렵(狩獵)에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졌지만 가축들과는 함께 놀아줄 만큼 친근감을 갖기도 했으며 특히 사람에게는 진돗개와 같은 영악스러움보다는 바보스러움에 가까울 만큼 순한 면이 있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특히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개는 그지역 주민들의 생활상, 그리고 지역민들의 성품에 따라 개의 성품자체가 구성되는 등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부 애견가들은 영국의 토종개인 불독은 착실하고 집요한 영국사람을 닮았고 독일의 토종인 세퍼드는 사납고 이지적인 독일인을, 프랑스 토종인 푸들은 유쾌하고 낙천적인 프랑스 사람을, 그리고 중국 토종인 챠우는 둔중하고 꿍꿍이 속인 중국사람을 닮았다고 했다.

이와 함께 우리의 한국 토종개들은 유교정신이 투철한 한국사람을 닮아 오륜까지 갖추고 있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주인에게 대드는 법이 없으니 군신유의(君臣有義)요 큰개에게 작은 개가 고분고분하니 장유유서(長幼有序)하며 아비의 털빛을 새끼가 반드시 닮으니 부자유친(父子有親)이요 때가 아니면 함부로 어울리지 않으니 부부유별(夫婦有別)하고 한 마리가 짖으면 동네개가 모두 호응하니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고 표현할만 하다고 했다.

지난 90년대 초반, 한때 거제에는 거제개보호육성회(회장 신홍규. 47. 현재 해금강화랑 운영.)가 구성돼 20여마리에 가까운 거제개를 보유, 이의 보호육성에 안간힘을 써 왔지만 이 단체도 자금난과 함께 지역민들의 무관심을 견디지 못해 서서히 소멸, 지금은 거제시 관내 순수혈통의 거제개는 거의 멸종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국 삽살개 보존연구회, 경북대 탁연빈교수와 하지홍교수는 지난 93년 거제개 보호육성회를 방문해 "거제개는 진돗개와 제주개 등 우리나라 일반적인 도서개와는 달리 사람과 친숙하면서도 강인한 투지력이 돋보이는 도서개로서 우리나라 다른 고유의 개들보다 토종성이 강하다"고 지적하고 "보존“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힌바 있다.

‘진돗개’의 경우 이 개들도 한때는 멸종위기를 맞았으나 국가에서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 보호육성해 지금은 수만마리에 이르고 진돗개가 전국으로 확산돼 사육되고 있으며 특히 지난 1982년4월10일에는 국제견연맹(IDF)에 등록되기도 했다. 또한 1969년에는 전설속에 묻혀가던 우리나라의 고유개 ‘삽살개’도 경북대학교 수의대 탁연빈교수와 하지홍교수에 의해 발굴돼 현재는 전국적으로 1,000여마리이상 길러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던 ‘풍산개’도 뜻있는 애견가들이 1995년, 제3국을 통해 북한에서 수입, 번식해 지금은 수백마리에 이르는 개들이 전국각지에서 사육되고 있다. 하지만 이 개들은 순수혈통의 풍산개가 아닌 북방개 일종이라는 일부 애견가들의 주장이 잇따르며 혈통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우리의 고유개들 중 특히 주인에게 충실하고 사냥능력이 뛰어났던 거제개는 정확한 문헌이나 고증조차 없으며 오늘날 전국 어디를 둘러봐도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지난 71년 거제대교개통과 함께 무분별한 외지 문물 유입이 거제개의 잡종화를 가속화한데다 지역민들의 거제개에 대한 관심부족속에 빈곤하고 소박했던 이들이 돈의 위력 앞에 서둘러 개를 팔아 버린 것이 오늘날 거제개 멸종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때문에 이제 그간 거제개와 함께 엮어오던 우리의 생활사는 되돌릴 수 없는 전설처럼 끝맺음해야 한다.

 

사라져 간 명물

가마솥 - 이웃간의 정이 그립고 사람과 사람간의 신의(信義)가 더욱 절실해 지는 지금, 가마솥의 그리움이 새로워진다.

가마솥

모내기를 할 때는 공동취사도구로, 수많은 사람들의 밥을 해냈고 누나가 시집갈 때는 돼지를 삶거나 떡국을 끓이기도 했다. 또 일년 먹을 된장을 담그기 위해 메주를 쑬 때는 콩을 삶아내는 도구로, 농사철 일거리가 많을 때는 한꺼번에 많은 소죽을 끓이는 소죽솥이기도 했다. 또한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는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동생이랑 나란히 들어앉아 목이랑 팔이랑 온 몸에 낀 땟자국을 씻어내던 영락없는 목욕탕이었다.

그러나 가마솥의 용도는 밥과 누룽지, 또한 구수한 숭늉생산과 함께 아름다운 인간미를 창조하는데 있었다. 가마솥의 밥은 꽁보리밥이라도 달착지근한 맛이 났고 밥 이후에 남는 누룽지는 시골 아이들의 간식으로, 또한 구수한 숭늉의 재료가 되기도 했다. 특히 봄철, 시골 모내기를 시작할 때면 큰 가마솥은 이 집 저 집, 이웃집으로 빌려가며 보리와 쌀, 그리고 팥으로 최대용량을 실어 밥을 지었고 또한 한 켠에서는 시래기국도 끓여져 푸근함을 제공했다.

이때는 온 동네 사람이 함께 모여 앉아 웃으며 나눠 먹고 또한 노약자나 병든 사람은 따로 밥을 담아 날라다 주며 이웃 정을 피워갔다. 한때 가마솥은 ‘하늘 천 따지 가마솥에 누룽지 딸딸 긁어서 선생님은 한 바가지 나는 한 숱갈...’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며 서당(書堂)의 훈장(訓長)을 괴롭혔고 또한 연료가 부족했던 시절, 가마솥 큰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아낙네들의 어려움도 함께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을 넘기며 우리의 사회구조가 대가족제도에서 소가족 제도로 변화, 밥을 짓는 데 가마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데다 대부분의 농가마다 농기계의 보급으로 모내기 등 농촌의 작업마저 가족단위로 행해져 마을 공동체의식도 서서히 퇴조, 가마솥의 용도마저 전설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 이 때문에 가마솥은 일찌감치 시골집 부엌에서 밀려나 담벼락 밑이나 뒷뜰에서 머물다 엿장수나 고물상에 넘겨지며 이제는 시골마을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보기는 힘든 상태다.
 

가마솥과 아궁이

가마솥과 아궁이

가마솥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이웃이 가족처럼 여겨지던 옛날의 인간미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특히 가마솥의 퇴조와 함께 구수한 숭늉맛이 간데없는 지금, 도심 속에는 나누는 이웃 정은 고사하고 인간의 불신마저 도를 넘어 소위 신세대로 불리는 사람들은 가마솥에서 얻은 노인들의 베푸는 정까지도 말살하고 있다. 서울의 아들 집에 올라온 할머니가 시골에서 가져온 호박으로 전을 부치던 중 마침 지나가는 이웃집 젊은 부인에게 호박전 몇 조각을 싸주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쓰레기를 버리러 갔던 할머니는 쓰레기통에 고스란히 버려진 호박전을 발견했다.

젊은 여인은 청결문제, 위생문제 등을 믿지 못해 이를 버렸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정(情)이 말살당한 배신감에 가슴 아파 했다. 가마솥이 인간과 함께 했던 그 시절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웃간의 정이 그립고 사람과 사람간의 신의(信義)가 더욱 절실해 지는 지금, 가마솥의 그리움이 새로워진다. 가난했지만 이웃간 베풀고 살던 그때, 특히 가마솥은 달착지근한 밥맛 외도 인간의 구수한 정을 창조(創造)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사라져 간 명물

화로 - 겨울철이면 구들목의 화로에 둘러 앉아 오손도손 고구마를 구어 먹던 기억들이 유년기 속에 자리하고 있는 화로 또한 사라져 가고 있는 우리의 명물중 하나이다.

화로성냥이나 라이터를 비롯 불을 지필 수 있는 도구는 물론 기초생활물자조차 궁핍했던 시절, 화로는 가정의 작은 태양이었다. 화로는 언제나 따뜻한 불씨를 안고 우리의 삶을 덥혀 주던 생활도구로 할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은 또 그의 아들에게까지 대물림 되며 언제나 따스함을 제공했고 또한 가족간 화목한 정(情)을 일깨웠다.

아침 일찍 불을 지핀 아궁이에서 화로에 불씨를 모우면 타고 남은 재로 덮어 잘 다독거리고 오랫동안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했으며 이 불은 어른들의 담뱃불, 다듬이질, 찬음식 덥히기, 또한 다음날 아침 아궁이의 불씨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겨울철, 화로는 바같 나들이에서 돌아오는 가족들의 추위를 녹이게도 했고 할아버지의 허리춤 느적이 찬 쌈지에서 눅눅한 황초를 꺼내도록 해 담뱃대에 재고 화롯불에서 장죽의 길이만큼 얼굴을 젖히고는 천천히 물부리를 빨아 입 언저리에서 엷은 안개까지 피워 내도록 하기도 했다.

또 화로는 길쌈하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는 인두를 묻었다가 동정(옷깃 위에 조붓하게 덧꾸미는 흰 헝겁, 오늘날 옷의 목부분, 칼라)의 다듬이질을 해냈고 귀여운 손자를 위해 알밤이나 고구마를 굽기도 했고 때로는 먹다 남은 된장국이나 식은 죽을 덥히기도 했으며 또한 놋양푼에 엉긴 조청도 녹이고 더러는 부스럼에 붙이는 고약을 눅게 했다. 이 때문에 특히 우리의 어머니가 가장 정성스럽게 보살펴야 했던 것이 화롯불이였다.

옛날 우리의 어머니는 시부모 받들기며 남편 섬기기며 또한 자녀들 보살피기와 시누이와 동서 눈치보기도 겨웠는데 부엌일이며 바느질, 길쌈, 농사 뒷바라지는 물론이고 기제사와 거를 수 없는 집안사이의 길흉사가 겹쳐도 가장 소중하게 보살폈던 것이 화롯불이었다. 어쩌다 화로의 불이 꺼져 이웃집에 불씨를 얻어러 가면 그것은 여자의 게으름 탓으로 돌렸기에 이 보다 더한 부끄러움도 없었다. 또 불씨를 나누어주면 그 집의 살림이 나간다는 속설도 있어 누구나 거절하기 일쑤였기에 화롯불을 구하기는 하나의 고통이었다.
 

화로

겨울철이면 구들목의 화로에 둘러 앉아 오손도손 고구마를 구어 먹던 기억들이 유년기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화로 또한 사라져 가고 있는 우리의 명물중 하나이다.

화로의 곁에는 쇠로 만든 부젖가락과 불손이 준비돼 언제나 불을 담을 구 있도록 했으며 어두운 꼭두새벽, 어머니는 화로의 불씨를 부엌으로 옮기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화로의 종류는 질화로나 사기화로와 같이 흙을 구워 만든 화로도 있었고 무쇠나 놋쇠, 또는 백동으로 만든 화로도 있었으며 돌을 쪼아 만든 돌 화로도 있었다. 이들 화로는 아름이 넘는 큰 것에서부터 지름이 한 뼘도 못되는 작은 것까지 있었고 생김새도 둥근 것, 네모, 여섯모, 여덟모, 열두모 등 각양각색이었으며 또한 화로의 모양새를 더하기 위해 무늬도 다양하게 새겼다.

화로중에서 사람들로부터 가장 아낌을 받던 것은 돌로 만든 돌화로였으며 돌화로 가운데서도 곱돌화로가 가장 긴하게 쓰였다. 곱돌은 특히 단단해 처음부터 끝까지 정으로 쪼아내는 공이 들었으며 속을 파고 전을 돌리고 또 몸통을 깎고 손잡이를 만드는 공정까지 모두가 한 솜씨로 이루어졌다. 또 때로는 화로의 몸통에 글씨나 무늬를 음각(陰刻)하고 그곳에 은이나 구리로 입사(入絲)를 하기도 했다. 이같은 공정을 거친후 곱돌화로는 몸통 전체에 들기름을 먹이고 하루 밤낮을 왕겨불에 구워내거나 옻칠을 해 윤이 나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장인(匠人)의 손에 의해 탄생된 화로는 필목(疋木)이나 곡식과 바꿈질되어 어느 가정으로 옮겨지면 그 날부터 불씨를 안고 그 집안의 작은 태양으로 모든 생활과 범절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화로는 지난 50년대중반 석유의 보급화, 성냥의 대중화, 석유, 석탄 등 연료의 혁신에 따른 난방기구의 발달 등으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특히 70년대초 농촌지역까지 전기가 보급되면서 우리의 생활주변에서 영원히 사라고 말았다.

 

사라져 간 명물

물레방아 - 1960년대를 넘기며 농촌의 농기계 보급과 전력화 촉진으로 급속한 사양길을 치달아 80년를 넘기며 우리의 주변에서 사라졌다.

물레방아우리나라 가요 중에는 물레방아가 간간히 등장한다. ‘물레방아 돌고 도는 내 고향 정든 땅… … 물레방아 도는 내력… … 물방아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을… …’  등등 이다. 또한 전근대적(前近代的) 농촌을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과 애정관계를 묘사한 ‘나도향’의 소설 ‘물레방아’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물레방아는 오늘날 우리에게 낭만적인 노래가사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아니었고 더구나 청춘 남녀들, 아름다운 사랑의 장소를 만들어 주기 위해 한가롭게 돌던 것만은 아니었다.

물레방아는 전례의 농기구 일종으로 물의 힘을 이용, 물레처럼 생긴 바퀴를 돌려 보리와 쌀을 찧었고 때로는 탈곡이나 제분에도 이용했으며 또한 발전(發電)에도 이용해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했다. 지난 60년대 이전만해도 우리나라 농촌지역에서 흔히들 볼 수 있던 물레방아는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바퀴를 돌리는 것과 드물게는 물이 바퀴 밑으로 흐르는 힘을 이용하는 밑방아도 있었다.

충북 음성지방에서는 물의 낙차로 돌아가는 것은 ‘동채방아’, 바퀴밑의 물을 이용하는 것은 ‘밀채물레방아’로 분류했으며 일반 지역에서는 물레방아와 밑방아로 구분했다. 일반적으로는 물레방아를 돌리기위해 개울옆에 도량을 파서 물을 대지만 보(洑)를 따로 마련하기도 해 보의 물은 농사철, 농사에 쓰고 가을과 겨울에는 물레방아에 이용했다. 물레방아는 돌확(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이나 맷돌, 절구, 그리고 디딜방아(발로 밟아 곡식을 찧던 기구), 연자매(소나 말을 이용했던 맷돌) 등에 곡식을 찧거나 탈곡을 의존하던 시절, 우리의 최첨단 생활도구로 사람의 노력을 크게 절감시키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물레방아의 작동원리는 바퀴를 가로지르는 방아굴대 양쪽에 눌림대를 설치해 바퀴가 돌아감에 따라 방아의 한쪽 끝이 눌러지며 공이가 들어 올려지도록 돼 있었다. 바퀴가 한번 돌 때 마다 방아공이는 한번씩 찧게되는데 방아 두 개를 나란히 설치해 오르락 내리락하며 곡식을 찧도록 설계돼 있었다. 물레방아의 바퀴는 당초 박달나무 등으로 만들었으나 바퀴자체는 다소 작았다. 그러나 1930년대는 바퀴의 크기와 방앗간 내부도 크게 변화했고 1950년대 이후는 물레바퀴 대부분이 철제로 바뀌었으며 물레방아는 곡물 가공 뿐만 아니라 발전용(發電用), 제지용(製紙用), 떡방아 메주 및 고추방아 등으로 이용이 다양해 졌다.
 

베틀

물레방아는 오늘날 우리에게 낭만적인 노래가사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아니었고 더구나 청춘 남녀들, 아름다운 사랑의 장소를 만들어 주기 위해 한가롭게 돌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1960년대를 넘기며 농촌의 농기계 보급과 전력화 촉진으로 급속한 사양길을 치달아 80년를 넘기며 우리의 주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곡식을 찧고 전기를 이르키던 기능은 상실했을 망정, 원형에 가까운 물레방아가 학교, 유원지 등 전국 곳곳에 설치돼 교육용, 또는 볼거리 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설치한 이들 물레방아는 물의 힘보다는 전력으로 돌아가고 있다.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레방아’하면 한가롭게 돌아가는 인근 유원지의 낭만적인 물레방아를 망막 속에 그리거나 나도향의 소설 물레방아를 머리 속에 떠 올리는 것이 고작일 성 싶다.

 

사라져 간 명물

돛단배 - 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필요했던 돛단배, 그러나 이제 그 실체는 기억의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고 간간히 작가들에 의해 강이나 바다에 떠있는 그림으로 묘사되며 우리에겐 가장 평화롭고 한가로운 대명사가 되고 있다.

바닷물의 움직임에 따라 하늘하늘 움직이던 돛단배는 범주선, 또는 범선이라고도 불리며 오랫동안 인간의 유일한 해상 교통수단 역할을 담당했었다. 6000년이 넘는 배의 역사를 통해 범선은 그 중심적 존재였으며 19세기 후반, 급성장한 세계 무역을 지탱한 동맥도 근대적인 대형 상업범선이었음이 사실이다. 나무로 만들어졌던 돛단배는 바람이 없는 날엔 노 젖는 번거로움이 뒤따랐다. 적당한 바람이 불때면 기계선 못지 않게 속력도 냈지만 바람 한점 없는 날에는 건너 보이는 가까운 거리도 쉬엄쉬엄 노를 저어 한나절 거리.

현재 레포츠용으로 각광받는 요트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돛단배는 지난 5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산업의 발달과 함께 대부분 동력화되기 시작, 60년대 중반을 넘기며 이곳 남해안일대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로마시대부터 18세기말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나라는 돛단배에 의한 해상 교통이 이루어지기도 했을 만큼 인간의 생활에 크게 기여했던 범선, 돛단배는 특히 이곳 섬지방 사람들은 물론 도서지방과 왕래가 필요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다.
 

나룻배

돛단배의 실체는 기억의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고 간간히 작가들에 의해 강이나 바다에 떠있는 그림으로 묘사되며 우리에겐 가장 평화롭고 한가로운 대명사가 되고 있다.

거제를 비롯한 남해안일대는 10명내외의 사람과 다소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길이 6∼7m의 돛단배가 많았으며 간간히 많은 화물을 싣거나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갈 수 있는 대형 범선이 있기도 했다. 특히 이곳 남해안의 대형범선은 많은 화물을 이동시키거나 또는 규모가 큰 어업에 이용됐는데 어업에 사용될 때는 이를 ‘우다시(범선저인망)’라고 불렀으며 지금의 대형 외끌이 저인망 어선에 속했다. 배의 규모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길이는 20여m에 이르렀고 폭은 5∼6m에 가까웠다.

돛단배는 바람의 힘으로 배를 추진 시키기위해 처음에는 동물의 가죽으로 돛을 만들었으나 차츰 갈대 등으로 엮은 돛자리를 기둥사이에 매단 돛이 나타나기도 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천으로 짠 돛을 사용한 기록으로는 이집트의 제1 왕조 이전(BC3300년경)의 예술품에 나타나 있으며 일찍이 지중해 연안의 문명국가가 해양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격전을 벌이던 당시부터 섬유로 짠 돛을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천으로 짠 돛은 1851년 미국의 경주용 요트, 「아메리카」호가 이를 사용, 영국의 요트와 경기를 벌여 이기면서 유럽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돛은 배의 크기에 따라 2개 또는 3개의 돛이 설치되기도 했으며 선박의 쓰임새에 따라 크기도 조절됐으나 가운데 돛대가 가장 높아 큰 돛을 달았다. 돛의 명칭은 위치나 그 근처에 있는 삭구(索具. 배에 쓰이는 로프, 쇠사슬따위의 총칭)의 이름에서 따오기도 하지만 선수(船首)에서 가장 가까운 돛대는 앞돛대, 가운데는 주돛대, 그 다음은 뒷돛대로 구분했다. 그러나 돛대도 돛도 바람이 없는 날엔 무용지물(無用之物), 사람들은 힘들여 노를 저어 물길을 헤쳐야 했다. 이때 우리의 선조들은 피곤함과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뱃노래를 만들어 불렀으나 우리의 지방에서는 그 흔하고 흔한 뱃노래 한가락도 전해지지 않고 오직 고기잡이와 연관된 가래질 노래와 멸치잡이 노래만이 뱃노래처럼 전해지고 있다.

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남해안은 도서지방이라는 특수성으로 더욱 필요했던 돛단배, 그러나 이제 그 실체는 기억의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고 간간히 작가들에 의해 강이나 바다에 떠있는 그림으로 묘사되며 우리에겐 가장 평화롭고 한가로운 대명사가 되고 있다.

 

사라져 간 풍물

가마니 - 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필요했던 돛단배, 그러나 이제 그 실체는 기억의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고 간간히 작가들에 의해 강이나 바다에 떠있는 그림으로 묘사되며 우리에겐 가장 평화롭고 한가로운 대명사가 되고 있다.

농경문화의 발달과 함께 시골에서는 쌀이며 보리며, 콩과 고구마 등 생산되는 대부분의 농산물은 짚으로 짠 가마니에 담겨져 옮겨지거나 보관됐다. 가마니를 짜는데는 우선 필요한 것이 짚을 손으로 꼬아 만드는 새끼줄이었다. 새끼를 꼬는데는 혼자보다도 여럿이 모이면 능률이 배가(倍加)돼 처녀들은 그들대로 총각은 총각들 대로 한자리에 모여 새끼꼬기며 가마니 짜기를 주로 했다.

인심이 넉넉하거나 혼자 외로히 지내는 과수댁(寡守宅)은 그 마을 처녀 총각의 모집소 였다. 낮에는 각종 농사일, 길쌈 등에 시간을 보내고 저녁나절, 짚을 추려 적당한 물을 뿌리고 짚이 눅눅해지면 일찌감치 저녁식사를 마친 청자 숙자 광자 영자 종금이 등 동네 처녀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짚단을 들고 한자리에 모인다. 호롱불 아래서 새끼 꼬기는 시작되고 우선 모두가 준비한 자가방송이 뉘집 며느리 출산소식, 갑석이의 입영일자, 영자의 혼사 택일, 얼음판에 미끄러진 상철이 총각의 안부 등 동네 소식들을 한꺼번에 쏟아가며 인간애(人間愛)를 꽃피웠다.
 

가마니

이제 산업화사회와 함께 지난 70년대중반을 고비로 마대(麻袋), 비닐류 등 각종 대용가마니와 멍석류가 개발되며 짚으로 만들어지던 가마니, 미수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뉴스가 끝나고 나면 자동 오락프로는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오동주 술타령이 오동동이냐…… 한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있느냐……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잘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에 말도 없이……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등 당시 유행하던 노래들이 합창으로 이어지고 한발 두발 새끼는 꼬여져 갔다. 당시, 새끼를 꼬는 기계가 있기도 했으나 이 기계는 주로 어장이나 공사장, 또는 공장 등에 쓰이는 굵은 새끼를 꼬는데 이용됐다.

남해안일대 어장에서 많이 쓰이던 굵은 새끼는 주로 이 기계가 담당했고 가마니를 짜거나 지붕을 이을때 쓰이던 굵은 새끼 등은 모두가 손으로 꼬았다. 거제지역 농촌에서는 한때 농사철이 끝나고 동짓날 긴긴 밤이면 새끼꼬기, 가마니 짜기, 속칭 미수리짜기가 주업(主業)이었다. 한때 거제지역에서는 가마니처럼 촘촘하게 짜지않고 다소 늘성늘성하게 짜는 미수리라는 것이 유행했는데 이는 멸치어장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멸치는 말리는 멍석 대용으로 팔려 갔다. 부지런한 농가에서는 온식구가 미수리짜기에 매달리다 보면 어느새 미수리는 현금화되어 닭이 되고 소가 되고 전답(田畓)으로 변해 갔다.

삶은 고구마에 김치가닥을 걸쳐 밤늦은 시간, 간식을 때우거나 간혹은 제사상에 차리고 남은 음식들까지 동원시켜 반 배라도 채우고 나면 어느새 자정은 넘고 꼬여진 새끼는 가마니 열장, 한죽꺼리가 충분했다. 어른들 깰까 봐 살그머니 돌아가는 쳐녀들의 발자국 소리에 잠귀 밝은 할아버지, 할머니는 벌써부터 새벽일을 시작했다. 저녁나절에 눅눅히 축여둔 짚단을 가져와 호롱불 밑에서 또 한차례 새끼꼬기 작업을 벌이는 것이다. 새끼가 꼬여지면 순수 목재로 만들어진 가마니틀을 이용, 새끼를 씨줄로 36가닥정도 늘리고 한사람은 한사람은 바농대에 짚을 물려 새끼 사이로 넣으면 한사람은 바디를 아래로 쳐 가면서 가마니를 짰다.

그러나 이제 산업화사회와 함께 지난 70년대중반을 고비로 마대(麻袋), 비닐류 등 각종 대용가마니와 멍석류가 개발되며 짚으로 만들어지던 가마니, 미수리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 때문에 농촌 어른들 사이에서는 사업화의 발달이 인간의 노력은 크게 줄였을 망정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며 함께 나누던 정담(情談)이나 인간애까지 앗아가 삭막한 사회변모를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사라져가는 명물―길쌈

화폐대용의 직물 생산, 의류도 자급자족, 길쌈노래 부르며 고부간의 정도 새록새록

길쌈은 인간생활에 필수 항목이었기에 한때 우리나라 농촌 가정은 년중 행사처럼 길쌈을 하지 않는 가정이 없었다.  길쌈은 부녀자들이 모시, 무명, 명주 등의 직물을 짜는 모든 과정을 일컬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명주길쌈, 모시길쌈 등은 삼한시대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무명길쌈은 1363년(공민왕 12) 문익점이 원(元)나라로부터 목화를 들여온 이래 정천익(鄭天益)에 의해 방적구(紡績具)가 만들어짐에 따라 방적제직이 일반화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면직물(綿織物)은 목화의 재배, 씨앗기, 숨타기 등을 거쳐 물레와 베틀을 이용, 베를 짰으며 마직물(麻織物)은 대마(大麻)의 파종후 수확, 껍질벗기기, 삼째기, 삼삶기, 베날기, 매기, 베짜기 순으로 제직(製織)했고 모시는 재배, 수확후 껍질벗기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날기, 매기 꾸리감기, 모시짜기의 순으로, 견직물(絹織物)은 누에고치에서 푼 견사로 제직했다. 특히 견직물을 생산하기위해서는 뽕나무 기르기와 누에고치치기, 실을 뽑은 후 명주실 켜기, 명주실 내리기와 날기, 명주매기, 짜기의 순으로 제직, 많은 일손이 소요돼 협동작업체를 조직, 이야기도 나누고 노래도 부르며 작업이 이루어졌다.  

영원히 우리 곁에서 사라져간 우리 풍물중 하나인 길쌈 장면

이들 길쌈으로 생산된 직물은 농가의 중요한 소득원으로 때론 화폐의 대용으로 쓰이며 가축의 구입이나 농토마련의 밑거름이 됐을 뿐 아니라 직물의 자급자족으로 가족들의 의류를 충당하기도 했다. 특히 길쌈을 하기 위해서는 물레로 실을 뽑고 베틀을 사용해 베를 짜야 하는 등 오랜 시간과 고된 시간의 연속이었으며 특히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서 고독한 작업이 이루어졌기에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기도하고 때론 가사(家事)의 계획 등도 정겹게 논의하며 차칫 멀어지기 쉬운 고부(姑婦)간의 정을 더욱 새롭게 했다.  그러나 부녀자들은 오랜 시간의 고독에 겨워 애환과 동경을 그리는 노래들을 불르기도 했는데 이를 길쌈노래라 했다.

특히 남해안일대는 비단짜는 노래로 『유주(琉珠) 비단 행군 낭게/ 명지 백필 감겼드니/ 그 씨 짜고 모자라면/ 넘으 씬들 못짤 소냐.』라는 노래가 불리어 졌으며 모시적삼노래로『모시적삼 저적삼안에 분통같은 저젖좀 보소/ 이 내손이 살살이 가면 에라 소리가 정만든다』는 길쌈노래도 불리워 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도 거제지역에는 뽕따는 노래, 누에노래, 목화노래 등 수많은 길쌈노래가 불리워 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길쌈의 퇴색과 함께 이들 노래도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져 이제는 그 누구도 기억조차 하지 않고 있다.〈삼국사기〉에는 길쌈노래로 회소곡(會蘇曲)을 불렀다는 내용이 기술돼 있으나 가사 또는 곡조 등은 알 수 없으며 다만 신라 유리왕 때 왕녀들이 육부(六部)의 여인들을 모아 삼을 삼으면서 승부를 겨루어 진편의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슬프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회소 회소」라는 여음이 들어가는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서〉, 〈삼국지〉, 〈후한서〉 등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길쌈은 예(濊),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등의 지역에서도 성행했던 것으로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삼국시대도 길쌈이 성행해 나라에서 적극 장려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또 통일신라시대는 길쌈이 한층 발달해 특산직물을 당(唐)나라에 보내기도 했으며 고려시대는 국정의 차원에서 길쌈을 장려했고 조선시대는 특히 양잠으로 비단옷을 짜는 것을 장려, 궁중에서는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고 잠신(蠶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했고 또한 잠실(蠶室: 잠실동 잠원동)이라는, 누에를 키우고 종자를 나누어주던 곳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길쌈은 조선말기까지 성행했으나 개화 및 서양직물의 수입으로 서서히 퇴색됐으며 거제를 비롯한 남해안지역은 지난 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모시길쌈, 삼베길쌈 등이 명맥을 유지하며 이곳지역 여름철 의류를 공급하기도 했으나 각종 의류소비의 형태변화와 함께 이제는 우리의 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사라져 간 명물

베틀 - 지난 1950년대 중반을 넘기며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발달과 함께 베틀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 이제는 우리의 주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베틀우리에게는 옷감이 없어 헌 누더기 하나라도 손이 저려 못버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때 우리네 농촌에서는 집집마다 베틀을 갖추고 무명이나 모시 삼 등을 이용해 베를 짰다. 베틀은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 고모 누나가 번갈아 가며 북속의 씨실과 틀위의 날실을 엮어 우리의 의상(衣裳) 자료인 베를 짜던 기구였다. 베틀은 부태허리, 앉을개, 눌림대, 선자리, 도투마리, 뱁댕이, 시치미, 누운다리, 말코, 북, 바디 등 순목재의 여러 가지 제품으로 이뤄졌으며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개발해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지난 1950년대 중반을 넘기며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발달과 함께 베틀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 이제는 우리의 주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베틀에서 베를 짤 때는 배모양으로 생긴 북속에 씨실로 사용되는 실꾸러미를 넣은 다음 북바늘로 눌러 실뭉치가 솟아나오지 못하게 막으면서 씨실을 날시과 교차시켰고 이때 날실을 고르며 북의 통로를 만들어 주는 동시, 씨실을 바디로 쳐야만 비로소 베가 짜 졌는데 이 바디는 흔히 가늘고 얇은 대오리를 참빗살과 같이 세우고 단단하게 실을 엮어 만들었다.

바디 위 아래는 나무를 끼워서 바디집을 만들었고 또 베틀에는 베를 짤 때 그 모양이 좁아들지 않고 일정하도록 활처럼 등이 휘고 끝이 뾰족한 최활을 이용, 짜여진 베의 양쪽 끝에 꽂았으며 베를 짜 도투마리에 감으면서는 날실이 엉키지 않도록 나무가지로 만든 꼬챙이 형식의 뱁댕이로 눌러 주었다. 당시 농촌의 주부들은 농한기는 온종일 베틀에 앉아 시간을 보낼 정도로 베틀에 매달렸지만 작은 날실과 씨실이 서로 맞물려 하나의 천으로 탄생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됐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는 시아버지, 남편, 시동생과 시누이, 아이들의 옷가지 하나만을 걱정한채 오직 씨실속에 시름담고 날실속에 인생을 담아 용기와 희망과 인내를 잃지 않았었다.
 

베틀

대부분의 지역에서 불려지던 우리의 고유민요인 베틀가는 베틀의 퇴조와 함께 사라져 가고 있을 뿐 아니라 조상의 지혜와 숨결이 담긴 우리의 베틀도 이제는 전설의 고향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베를 짤 때는 지루함을 달래기위해 민요(民謠)를 부르기도 했는데 이 민요는 장형(長型)이 많은 박자위주의 음영(吟詠)으로 대부분 베틀의 구조와 기능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 민요는 베틀위에 앉은 부녀자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에 비유했고 베틀의 다리에서부터 시작해 앉을개, 부태, 말코, 비거미, 용두머리, 등의 모양과 율동적인 작업을 의인화(擬人化) 하거나 자연계의 실재(實在), 동물의 생태, 기타 현상들에 비유해 형상화(形象化) 했다. 또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물들을 끌어다가 노동기구에 대한 찬가(讚歌)로 엮었으며 이는 노동도구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다.

가수(歌手)들의 육성이 담긴 녹음테프는 고사하고 유행되는 유행가(流行歌)조차 제대로 없던 시절, 이 민요는 베를 짜던 어머니가 지루함을 달래던 하나의 수단이기도 했다. 우리의 지역에서는 베짜기가 성행하던 시절,「베틀다리 네다리는 동서남북 갈라놓고 그위에 앉은 양은 노양각시 자기한다…… 도투마리 넘는 소리 쿵절사 쿵더쿵…… 청남땅 황대령아 영아손목 거머쥐고 데야데야 놀아보세」등의 베틀노래가 불려 졌으나 베틀의 토조와 함께 이제는 그 어디서도 이 노래를 들어 볼 수가 없게됐다. 또 경기도 일부 지역에서는 ‘부태라 드른 양은 허리안개 두른덧다…… 바디집 치는 소리 봉황이 제짝 잃고 우지지는 소리 같고……’라는 베틀노래가 구전돼 왔으나 정확한 가사내용이나 지역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에서 불리워지던 우리의 고유민요, 베틀가는 베틀의 퇴조와 함께 사라져 가고 있을 뿐 아니라 조상의 지혜와 숨결이 담긴 우리의 베틀도 이제는 전설(傳說)의 고향(故鄕),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출처 : 우리 고유의 풍물과 명물
글쓴이 : 허브미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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