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따듯한 눈물 흘려보고 싶은
가슴깊이 묻어둔 기억속 그리움 하나 들춰보고 싶은 계절
가을은 비워 채울 수 있고 버려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줍니다
빡빡한 삶의 여정에 쉼표 하나 찍고 바라보는 가을하늘로
여유가 떠돌지만 오만가지 상념이 교차하며 춤을 춥니다
따사로운 볕과 스산한 바람이 함께하는 가을은
궁핍과 풍요가 공존하는 계절인가 봅니다
아직은 계절의 변화가 눈에 띄지않아
가을이 시작되었는지 조차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로수 은행잎이 길 바닥에 나 뒹굴고
바바리 코트 깃이 목에 세워져야
비로소 가을이 왔음을 깨닫게 되는게 우리네 일상입니다.
그러나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 가는 곳이 있습니다
벌건물이 산정을 채색하며 뜨겁게 타오르는 곳
지리산 천왕봉이 바로 그곳입니다
가을을 먼저 맞이하고픈 욕심으로
매년 시월 초가 되면 만사제쳐 놓고 지리산 천왕봉을 찾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든 지리산정은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붉은단풍이 촘촘하게 수를 놓았습니다
붉게 타오름이 너무나 뜨거워 그랬는지 아니면 질투의 앙금인지
하늘에서 내려온 운무가 단풍을 덮으려 몸부림 치지만
단풍은 운무를 밀어내고자 안감힘을 다하는데
저들의 지독하고도 처절한 애증은
내겐 더할 수 없는 감동의 가을잔치가 되었습니다
손과 발이 있어 그곳에 올라
눈과 마음이 있어 보고 담을 수 있음이
한없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 순두류 >
눈만 감고 뒤척거릴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새벽 두시에 눈을 떠야되는 강박관념이 잠을 설치게 합니다
주말이면 매번 겪는 일이라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상황은 매번 똑같아 괴롭습니다
제대로 잠들지 못한 무거운 몸둥이 일으켜
주섬주섬 배낭을 꾸리고 집을 나서는데 걱정이 태산입니다
우선당장 3시간여를 운전해야 하는일과
만만치 않은 산행길이 그렇습니다
다행히 동행인 <여운>부부가 차량을 제공하여 한숨 놓습니다
남들보다 먼저 가을을 맞이하는게 결코 쉬운일은 아닌가 봅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모든 일에는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고
얻고자 하는 것은 그 다음에서야 손에 잡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둠속을 달려 중산리에 당도하자 사위가 환해지고
약속시간에 맞춰 화순에 터를 둔 <하얀나비>부부가 도착함으로서
세부부 여섯명의 인원으로 지리산정 가을바라기 산행이 시작됩니다
< 써레봉 능선 > 순두류 가는길은 시멘트 포장로라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지루하고 무료 無聊)한 길입니다 그래서 인지
굽이진 도로 사면으로 조금빨리 가려는 샛길이 두어곳 있어
그 길을 찾는데 옹벽위로 산죽이 가지런히 베어진 길이 보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무심코 올라선 발걸음이
아뿔사 초장부터 알바를 하게 됩니다
한참을 올랐던 길은 묘지에서 끝나고
산죽밭이 그만 돌아가라고 가로막습니다
성묘길을 잘못 들어섰던 것입니다.
분한 마음은 자연학습원 입구에 도착하자 흘린 땀과 함께
스르르 자취를 감추고 본격적인 산행에 몰입합니다
산책로 같은 순두류 법계사 오름길을 널널하게 오릅니다
마야계곡에서 들려오는 유수소리를 꼬리잡아 산죽숲을 헤치고
서늘한 바람이 이는 계곡으로 내려서 뜨끗한 커피를 마십니다
물가 나무는 사면에서 자란 나무보다 단풍물이 일찍드는데
골안 차거운 냉기가 계절을 앞당겨 그런가 봅니다
침엽수를 빼놓고 색동옷으로 갈아 입을 채비를 마친 숲은
녹음이 빠져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연한색감 입니다
초심은 때묻지 않고 싱그러움이 수정처럼 맑아 좋습니다
처음으로 하는일.. 처음 만나는 순간.. 그리고 첫사랑..
초입 지리의 가을도 초심같이 투명하고 깨끗하게 우릴 반겨줍니다.
커피와 사과로 원기를 충전하고서 잠시 계곡을 따릅니다
깊은 숲속 아침향기가 가슴에 가득 차오르자
오른족 갈비뼈가 찌릿하게 아려옵니다
일주일 동안 쌓인 세속땟물이 씻기어 말끔해지는 증세로
지리산에 들면 나타나는 일종의 행복바이러스성 고질병 입니다
세부부 모두가 붏혹의 중턱을 넘나드는 나이지만
흐뭇함이 넘쳐나 먼 기억속 동심을 빌려옵니다
좋아라 손뼉치고, 재미있어 웃고, 다래 두어알 따서 입에넣고
신맛에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이 모두가 산에서 즐기는 원초적 기쁨이라 여깁니다.
계곡을 빠져나와 산산히 무너져내린 암봉 너널길에 올라섭니다
바윗돌 하나가 티코차 만한 큰 너덜길 입니다
능선 안부까지 사면 전체가 너덜강을 이뤄 오름이 여의치 않습니다
아내가 버겁다는 표정을 살짝 내 비칩니다
아마도 만성이 되버린 허벅지 통증이 시작되나 싶어
남들 모르게 살며시 속도를 늦춰 진행합니다.
한피치 정도의 슬랩구간을 통과한 후 조망바위에 올라섭니다
우뚝하게 세워진 조망대라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기분이지만
우쭐한 마음은 금세 시들고 맙니다
사위가 온통 운무로 덮혀있기 때문입니다
잠깐 열려있던 장단골과 황금능선 그리고 올라온 중산리 마저
떠도는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고 빗방울도 한 두방울 떨어집니다
지리동부능 가을단풍바라기 산행은 이렇게 허무히 끝나는가
천왕과 중봉 사면에 촘촘히 박힌 보석단풍은 어이 보고
써레봉 능선을 장식하는 불꽃 열정의 단풍은 또 어이본단 말인가
왜 하필 오늘 이 모양이지...
운무를 바라보며 한탄에 한탄을 거듭하는데..
그러나 이 순간이 우리에게 잊지못할 감격의 서막이었다는 걸
써레봉 정상에 올라선 후에서야 극적으로 알게됩니다
< 써레봉에서 바라본 천왕봉과 중봉사면 > < 운무에 휩쌓인 천왕봉 > 조망대를 떠나 써레봉을 향하는 능선길
자욱히 내려앉은 운무사이로 곱게물든 단풍이 반짝입니다
푸른숲은 금세 울긋불긋 오색단풍으로 뒤바뀌고
시공을 건너뛰어 딴 세상에 뚝 떨어진 내린것 같아
모두가 어리둥절 어쩔줄 몰라하지만 이내 추색에 젖어드는지
울적했던 기분을 털면서 화사한 단풍에 넋을 놓습니다
운무에 가린 써레봉 조망대에 올라서자 많은 산객들이
닫혀진 조망은 아랑곳 않고서 다리쉼을 하기위해 머물러 있습니다
써레봉 능선에는 봉우리가 많이 있는데 써래날이 여러개 세워 있듯이
봉우리도 이름에 걸맞게 여러게 있습니다
운무에 잠긴 조망은 열릴줄 모르고 중봉에서 점심상을 차리려
오랜시간 휴식을 마치고 일어서 막 출발하려는 순간
산객들이 일제히 고성을 질러댑니다
꽉 막혔던 운무가 서서히 찢어지며 그렇게 보고 싶었던
천왕봉과 중봉 사면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던 겁니다
환희의 눈물이란 이런때 흘리는 눈물일 것이고
기쁨의 환성이란 이러한때 질러대야 온당하여 눈총받지 않을 것입니다
참말로 사람 환장하게 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쥐 죽은듯 고요하던 운무가 갑자기 요동치며 빠르게 움직입니다
어릴적 엄니가 걸레를 만든다며 낡은 이불포 무명베를
갈기갈기 찢는걸 본적 있습니다
운무는 그와같이 쫙쫙 찢어져 바람에 갈기갈기 날리고 있었습니다
찢어진 틈세로 보일듯 말듯 천왕의 단풍이 웅성거리고
서서히 흩어진 연무를 걷어내며 휘황찬란하게 등장하는 단풍
반고호의 정렬적인 색감과 광기어린 열정의 붓터치가 저와 같을까
도대체 정열되지 않아 혼란스런 저 광경이 내게 희열을 던지며
가슴을 왜 이리도 잔혹하게 도질질 치는 것일까
뜨겁게 달궈진 가슴에 지글지글 튀어오르는 탄성
리듬을 타지 못한 심장이 역류해낸 핏줄기가 얼굴을 붉히고
영혼보다 더 은밀한 깊이로 삶을 느껴봅니다.
< 써레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 차마 뗄수 없는 걸음을 달래어 중봉으로 향합니다
때를 놓친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어대나
단풍에 현혹된 육신은 갈 길을 미루지 못합니다
한 걸음 옮겨 바라보면 현란하게 파도치는 추색물결
다시 한걸음 옮겨 둘러보면 운무와 단풍이 그려놓는 천상선경
맥빠진 다리는 중력을 이기지 못해 어그러적 거려도
영혼은 저들과 하나가 되어
신나게 전개되는 가을잔치에 끝없이 빠져듭니다
< 천왕봉 > 천왕의 기세에 눌려 산정마저 납작하게 머릴조아린 중봉
중봉에 서면 우선 마음이 편안하여 그지넉한 지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너른 초지의 산정이 그렇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바라볼수 있는 반야봉과
그 앞에 일렁이는 연능 그리고 지리천왕에 지펴진 첫 단풍을
속속들이 바라봄이 이 시기 중봉의 매력입니다
하봉내림길 삼거리를 지나 펑퍼짐한 중봉 산정길을 걸어오르면
상어이빨처럼 돌기된 천왕의 동부능이 갑자기 부상하면서 움찔하게 만들고
곧이어 나타나는 천왕의 두상은 바라보는 자로 하여금
이 곳이 민족의 영산이란걸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장엄한 모습입니다
늘 보는 장면이지만 볼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지고 자세를 가다듬게 됩니다
중봉에 올라 흐르는 시간을 잊어봅니다
중봉골을 가운데 두고 써레봉 사면과 천왕 동능 사면에 번지는 단풍물결
칠선계곡을 향해 하강을 시도하는 단풍물결
천왕에 타오르는 불꽃화염
가을이 깊어갈수록 수많은 골과 능선은 붉게 타오를 것이고
열정을 태워버린 지리는 비우고 버려 더 많은 것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점심상을 차리고 바라보는 지라산 가을축제
말끔하게 걷히어 사라졌을 거라고 여겼던 운무가
천왕 동능에서 태동하더니 농염한 춤사위를 부리며
화려한 가을 축제의 휘날레를 장식합니다
참으로 고맙고 황송한 지리의 선물이라 여기며
주목과 단풍사이로 소용돌이 치는 운무의 나래를 바라보고
복 받쳐 오르는 마음 달랠길 없어 중봉 조망 암봉에서 소리없이 외쳤습니다
내게 신(神)이 있다면 아름다운 당신의 모습이라고...
< 써레봉 >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를 가리키니 하산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아쉬운 마음은 고이접어 다음을 기약하며 중봉 고사목에 매달고서
급비탈 골짝기를 따라 내림을 합니다
중봉샘은 물이 가득하나 물속에 자그마한 유충이 떠돌고 있습니다
한 참을 내렸을까 첫번째 밧줄구간 못미처에 여성산객 한명이 앉아 있습니다
우릴보며 반가운 표정으로 얼마쯤 가면 치밭목산장이냐고 물어 옵니다
자세한 설명을 한뒤 같이 하산하든지 다시 올라가라 했습니다
아직 지치지 않아 다시 올라설 수 있다기에 그리 하라 했지만 무사한지..
숲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써레봉 단풍이 지친 걸음에 위안이 되고
이십미터 직폭도 멀리서 눈요기로 대신하며
어두워지기전 하산을 마치려 급사면을 빠르게 내려옵니다
다행히 순두류 자연학습원에 무사히 도착하고
어둠이 내려앉는 시멘트 포장로를 따라 중산리 매표소를 통과하여
파전과 도토리묵으로 가을 단풍바라기 산행을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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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좋아하는 산친구님의 지리산 연가...
글쓴이 : 초록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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