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토리 2 ♣

♣ 한시산책 - 황진이(黃眞伊) 편

그대는 모르리 2010. 12. 11. 19:18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황진이는 미모와 기예가 뛰어나서 그 명성이 조선천지에 널리 퍼졌다.


     위의 시는 황진이의 대표적 시로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풍류명사(風流名


     士)'가 아니면 어렵다기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방법을 물었다.
     이달이 “그대가 황진이를 만나려면 내 말대로 해야 하는데 따를 수 있겠오?” 하고 물으니 벽계


     수는 “당연히 그대의 말을 따르리다”라고 답했다. 이달이 말하기를 “그대가 소동(小童)으로 하


     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여 황진이의 집 근처 루(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있으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 만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


     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吹笛橋)를 지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일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벽계수가 그 말을 따라서 작은 나귀를 타고 소동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들게 하여 루에 올라 술


     을 마시고 거문고를 한 곡 탄 후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니 황진이가 과연 뒤를 쫒았다. 취적교에


     이르렀을 때 황진이가 동자에게 그가 벽계수임을 묻고 위의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가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다 나귀에서 떨어졌다.
     황진이가 웃으며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단지 풍류랑일 뿐이다”라며 가버렸다.


     벽계수는 매부끄럽고 한스러워했다고 한다.


 


 


 


    奉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 /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설중야국황] /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소세양이 소싯적에 이르기를,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황진이의 재주와 얼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에게 약조하기를 “내가 황진이와 한 달


     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네.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사람이 아니네”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보니 과연 뛰어난 사람이었다. 30일을 살고 어쩔 수 없


     이 떠나려 하니, 황진이가 누(樓)에 올라 시를 읊었다.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을 하면


     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더 머물렀다고 한다. 


 


      蕭寥月夜思何事 [소요월야사하사] 달 밝은 밤이면 그대는 무엇을 생각하나요.


     寢宵轉輾夢似樣 [침소전전몽사양]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을 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 [문군유시녹망언] 붓을 들면 때로는 제 이름도 적어보나요.   


 


     此世緣分果信良 [차세연분과신량] 저를 만나 기쁘셨나요?                  


     悠悠憶君疑未盡 [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 [일일염아기허량] 하루에 제 생각 얼마만큼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 [망중요고번혹희] 바쁠 때 얘기해도 제 말이 재미있나요.   


     喧喧如雀情如常 [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두 사람의 사랑이 그 뒤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냈으며, 몸종을 시켜 한양에 있는 소세양에게 전하게


     했다는 글이 위의 시이다.


     소세양은 황진이가 유일하게 남자로 사랑했던 인물로 당대 제일의 문장과 일세를 풍미했던


     재색의 멋과 격이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 시이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난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 하노라』


  


     위 시는 임제라는 사람이 황진이를 기리며 읊은 시로 전해진다.


     임제(林悌)는 선조때 사람으로 황진이보다 한세대 뒤에 태어났으니 생전에 황진이를 만난 일은


     없었다.

 

     그렇게 사모하며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한 번 죽으면 잡초가 우거진 무덤에 백골만 묻혔는가


     하는 덧없는 인생을 한탄하는 애끓는 심정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 조정관리가 기생의 무덤을 찾는다는 것은 지극히 파격적 행동으로 임제가 평안도


     사로 부임하던 날 황진이 무덤을 찾는다.
     지난날 뭇 남성들의 선망 대상이던 황진이의 아름다운 자태와 낭랑한 목소리, 가야금 위에


     서 나비처럼 춤추던 손길은 간데도 없이 무덤에는 잡초만 우거져 있었다. 임제는 인생무상


     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는 몸소 제문을 짓고 무덤에 술잔을 올리며 노래하였다.


 


 


 


조선 중종때 개성의 기생, 시조시인.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3절(松都三絶)이라 일컫는다.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황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


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서경덕이 처사(處士)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 하


다가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고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 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해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 길에 묻어달라, 관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


하라"는 등의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한다.


 


 





 

♪ 알고싶어요 / 황진이詩,이선희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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